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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의 과거

내가 아는 나의 사랑은 찐 짝사랑이었다.

by latte586 2021. 11. 12.

12월에 접어들면 새해를 맞을 준비로 마음이 바빠진다. 한 해를 보내며 내가 잊고 처리하지 않은 일은 없는지, 감정적으로도 후회와 미련을 모두 비워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병적인 집착이 조바심을 키우며 마지막 한 달을 허둥대게 한다.

제일 먼저 가계부를 주문한다. 가계부 준비로 시작한다고 하면 나를 보는 시선들이 달라진다. '이 사람은 매사에 꼼꼼한 성격이겠구나.' 

고백하자면, 내 가계부 기입 실력은 그다지 훌륭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평균 이하로 형편없다. 펼쳐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두꺼운 노트 크기의 금전 출납부라는 것을.

꼼꼼히 계획하고, 하루하루 아껴, 한 해가 마칠 때쯤 목표를 달성하는 기쁨의 과정은 없다. 하루 총지출과 그 내역... 수입이 일정치 않아도 지출은 일정한 패턴이 있으니, 그렇게 한 달 한 달 수입과 지출을 맞추며 적어온 단순한 내 기록일 뿐이다. 5년 전 호기심에 등록한 '아카이브' 수업에서 확신했었다. 내 가계부의 기록은 나한테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오늘은 11월의 어느 날이다. 곧 내게 새로운 금전출납부가 필요해진다. 가족의 수가 줄어 기입할 항목도 줄었으니 내년에는 작은 수첩크기의 가계부로 바꿀까 고민하다 불현듯 떠올랐다. 기록의 행위가 시작된 이유가.

대학생이었던 80년대 중반. 누군가를 하루 종일 마음에 담아둔 시절이 2년 정도 있었다. 새벽 4시. 그 어두운 중앙도서관 가던 길... 그와 한 공간에 있을 수 있어 설레는 길이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작은 '양지 다이어리'. 그에 대한 마음을 적는 것으로 내 기록은 시작되었다. '3번, 2번, 0'  그와 마주친 횟수였다. 2보다 큰 수가 적힌 날은 행운이 찾아준 날이었고, 우연히 하굣길에 같은 버스를 타거나, 마주친 순간에 인사말이라도 듣는 다면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채워졌다.

그가 여자랑 이야기를 나누며 스쳐간다? 내겐 눈인사도 없다?  그런 날은 '누구일까?  왜 모른 척했을까? 나는 도대체 뭘 바라는 걸까?' 묻고 답하며 밤새 잠을 설쳤었다. 그리고 어김없이 다음날 내 수첩엔 딱 한 글자만 쓰여 있었다. 

'끝!'

혼자 속앓이 하는 짝사랑은 상대가 모르고 있다는 단점과 언제든지 조용히 혼자서 끝낼 수 있다는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내가 아는 나의 사랑은 찐 짝사랑이었다.

하지만 나를 아는 사람들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눈빛과 표정만으로도 '이 여자는 저 남자를 좋아하는구나' 알 수 있었다고 친구들은 측은해했었다. '짝사랑은 무슨...' 핀잔을 듣기도 했다. 

2년여 동안의 가슴앓이를 정리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날 위해 모두가 모르는 척해주었다는 것을. 혼자 행복한 사랑에 그저 앞만 보았고, 그래서 표현도 거리낌 없었고 그래서 '아픈 사랑은 아니었다' 감사하며 조용히(?) 접을 수 있었다. 

그는 군에 갔고, 내게도 현실의 남자 친구가 생겼다.

그때부터 내 다이어리엔 약속의 스케줄과 금전의 입출만 기록되었다.  "왜 니 기분은 안 적어?" 친구가 물었고, 다른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는 남자 친구와는 소소한 하루하루가 없어서 그렇다... 그 비슷하게 답했었다. 친구의 반응도 기억한다. "소소한 게 없다고? 니가?"

솔직한 답은 아니었다. 눈빛에서조차 차고 넘치던 절절함이 없어서 그렇다고 답할 순 없었다.

그렇게 내겐 금전출납 기능의 스케줄러만 하나둘 늘어갔다.

그 2년의 다이어리는 결혼 후에도 보관했었다. 20대 초반의 추억이고 기록이라며 이삿짐을 쌀 때마다 제일 먼저 챙겼었는데... 결혼과 출산, 육아의 중간 어디에서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가계부를 쓰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 나에게 '가계부 쓰기'는 하루 일과의 마무리로 습관처럼 굳어졌다. 고단해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도 한잠 자고 난 후 다시 일어나 가계부 정리를 마쳐야 편히 잠들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시선 왼편에 2021년 가계부가 놓여있다. '양지 가계부?'

'양지'였구나.

한 권을 마무리 지어가는  이 시점에서야 그걸 알아차리다니... 내가 요즘 이렇다. 매사에 의욕이 없다. 감정의 기복은 줄고,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루하고 따분하다.  더구나 특별히 나쁜 게 없으니 괜찮은 것 아니냐며 내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나이라는 숫자가 커질수록 조용한 안정을 원할 것이라는 그 생각도 편견이다.

불혹, 지천명을 지나 곧 다가올 '이순'의 평안함이 나는 절대 반갑지 않다.

 

                                                         무슨 보물처럼 모셔 두었다.

                                  시간이 좀 더 흐른 뒤,  내 노력들이 추억과 그리움을 가져다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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